1960년대, 이란 최초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앞에 서 있는 젊은 여성.

이 곳은 현대 이란의 상징으로 여겨진 곳으로, 이란의 수도 테헤란 북서쪽에 있었다.


1963년, 이스파한의 주민들이 사진을 찍는 미국인 어린이들을 구경하고 있다.


1967년, 이란 부부와 12명의 아이들


1961년, 마잔다란 지방에서 결혼식을 앞둔 커플


1960년대, 이란 남부 후제스탄주에서 차도르를 입은 여성과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함께 걷고 있다.


1963년, 쉬라즈를 여행 중인 부부. 뒷쪽에 보이는 건물은 페르시아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는 하페즈의 영묘이다.


1961년, 보루저디(Borujerd)광장의 주민들. 뒷편으로 다리우스(Daryoush)극장이 보인다.


테헤란 근교의 압 알리(Ab-Ali)리조트. 1932년 리프트가 설치된 이란 최초의 스키장이다.


1960년대, 테헤란 레이(Rey)에서 카펫을 세척하는 주민들. 


1960년대, 테헤란 레이(Rey)를 방문한 미국 관광객들이 카펫을 건조하는 언덕을 올라가보고 있다.


1960년대, 테헤란 레이(Rey)의 카펫 건조


1970년, 타흐테 잠쉬드(Takht-e Jamshid)대로. 혁명 후 탈레그하니(Taleghani)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60년대, 파르수주의 페르세폴리스


1965년, 테헤란의 어린이들


1965년, 테헤란 미국인학교. 1953년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의 실각 후 건립되었다. 

이 학교는 1977년까지 미국을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국인 학교였다.


1960년대, 서부 이란 로레스탄주 Aligudarz 마을에서 수의학을 가르치고 있다.


1968년, 이스파한 보건학교의 여학생들


1965년 겨울, 테헤란 공원에서 손자와 할아버지


1960년대 초중반, 비틀즈는 유럽과 미국을 정복했다.

일본도 비틀즈 인기 광풍에 예외는 없었지만 비틀즈는 일본 방문 예정이 없었고, 이에 짝퉁 비틀즈가 도쿄의 클럽에 등장했다. 이들의 이름은 '도쿄 비틀즈(Tokyo Beatles )'













도쿄 비틀즈는 영어와 일본어로 비틀즈 노래를 불렀고 앨범까지 출시했다. 하지만 1966년 6월, 비틀즈가 일본을 방문해 일본 부도칸(日本武道館, Budokan)에서 공연하였고, 도쿄 비틀즈는 이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1961년 8월 12일 토요일, 약 4천 명이 동 베를린에서 서 베를린으로 탈출했다. 사실 탈출이랄 것도 없는 것이 이때만 해도 슬쩍 철조망을 발로 차서 뭉개고 나면 이동은 매우 쉬웠기 때문이다. 























대규모 탈출이 이어진 다음날, 동독 정부와 소련은 주민들의 이동을 막을 장벽 건설에 돌입한다. 이윽고 8월 15일부터 전선으로 구축된 경계선을 모두 콘크리트 벽으로 건설하기 시작하며 베를린장벽이 태어난다.

결과적으로 이날 맨몸으로라도 탈출한 4천 명은 후손들에게는 로또와 같은 선택을 한 셈이다.


관련글 : 단결을 위해 탄생한 베를린 장벽


현재의 운동경기에는 비디오 판독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천분의 1초, 만 분의 1초를 잡아낼 수 있는 고속 카메라 기능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보다 정확한 기술 덕분에 기록 스포츠뿐만 아니라 야구나 축구에까지 비디오 판독이 그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의 결승선 판독 모습이 장관이다. 사진 속에는 23명의 결승선 심판들이 눈을 부릅뜨고 라인 근처를 지켜보고 있다. 여러 명의 눈으로 어떻게든 오차를 방지하려는 모습이 지금에 와서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1961년 4월 12일, 구 소련이 발사한 세계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1호(Vostok 1)’가 우주에서 108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비행하고 지구로 돌아왔다.




모스크바에서 약 700km 떨어진 곳에 안전하게 착륙한 비어있는 캡슐의 모습이다.




2차대전 시기 나치를 피해 아지트로 사용하던 다락방을 다시 찾은 오토 프랑크(Otto Frank).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1945)의 아버지이다.



베트남 시장, 1967-68년


베트남 시장, 1967-68년


베트남 시장, 1967-68년


베트남 시장, 1967-68년


베트남 시장, 1967-68년


베트남 사이공 시장, 1967-68년


베트남 사이공 시장, 1967-68년


베트남 시장 입구, 1967-68년


베트남 의회 건물, 1967-68년


사이공 거리, 1967-68년


베트남 주택가, 1967-68년


사이공 거리, 1967-68년


사이공 거리, 1967-68년


베트남 거리, 1967-68년


베트남 거리, 1967-68년


베트남 거리, 1967-68년


베트남 거리, 1967-68년


베트남 거리, 1967-68년


베트남 주택가, 1967-68년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여성들, 1967-68년


쩐 응우웬 헌(Tran Nguyen Han)동상, 1967-68년


사이공의 박하(Bac Ha) 교회, 1967-68년


사이공 벤탄 시장, 1967-68년


빈롱(Binh Long)의 식당, 1967-68년


빈롱(Binh Long)의 구두수선공, 1967-68년


베트남 시골 거리, 1967-68년


베트남 시골 거리의 우마차, 1967-68년


베트남의 주택가, 1967-68년


베트남 시장, 1967-68년


베트남 시장, 1967-68년


베트남 시장, 1967-68년


베트남 시장, 1967-68년

(사진: John L. Beck)



1966년 11월 14일, 휴스턴 텍사스의 애스트로돔(Houston Astrodome) 특설 링에서 무하마드 알리와 클리블랜드 윌리엄스(cleveland Williams)의 WBC 헤비급 타이틀전(15라운드)이 벌어졌다.


무하마드 알리는 불과 24세 301일의 나이로 26승 무패의 전적을 자랑하는 정점에 오른 복서였다. 

클리블랜드 윌리엄스 역시 한창때인 33세의 나이의 경험 많은 강펀처였다. 하지만 그는 이 시합이 있기 2년 전(1964년 11월 29일) 경찰과의 시비 끝에 복부에 총상을 입고 네 차례의 수술을 받고 복귀한 상태였다.


좌측 다리의 신경이 손상되고 소장 절제술까지 받은 그의 권투 인생은 끝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1966년 2월 8일 링으로 복귀하는 기염을 토했고, 5연승을 거두며 성공적인 재기를 이룬 끝에 알리와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안타깝게도 알리와의 대결은 사진처럼 처참했다. 윌리엄스는 2회에 3번, 3회에 1번의 다운을 당했고 결국 심판은 3라운드 1분 8초를 남기고 TKO를 선언했다.


경기는 알리의 압승으로 끝났고 대자로 뻗은 패자의 모습은 관객의 입장에서 통쾌해 보이기만 한다. 하지만 사진에서 볼 수 없는 클리블랜드 윌리엄스의 복귀에 대한 집념은 실로 기적 그 자체였고, 그는 링에 오르기전 이미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승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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